복음주의 페미니즘
오래 전 TV 광고 카피 중에 "모든 이들이 YES! 라고 말할 때 NO!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오늘 리뷰하게 되는 책이 바로 이 광고 카피와 같은 책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고백하는 전통적 개신교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삶의 최종적인 권위는 바로 성경이다. 성경만이 오직 우리 삶의 유일한 권위이며 행동과 판단의 기준이 된다. 이러한 성경의 권위는 결코 변개하거나 훼손할 수 없으며 이러한 성경의 순수성과 무오성을 수호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수 많은 성도들은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본서 <복음주의 페미니즘>은 바로 이와 같이 모든 개신교 신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고 받아들여지는 성경의 권위에 기초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밝힌 탁월한 저작이다.
이 책의 저자 '웨인 그루뎀' 박사는 복음주의 목회권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저명한 성경신학자이자 조직신학자이다. 그런 그의 2006년 발간된 너무나 귀한 책이 이번에 CH북스를 통해 번역되어 한국 교회에 소개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고 기쁜일이 아닐 수 없다. 책의 제목인 복음주의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대다수 신자된 독자들에게 매우 낯설다. 현대사회에서 페미니즘이라는 어휘가 갖는 느낌이나 분위기가 사실 썩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기에 책의 제목은 더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이 책에서 드러나는 논쟁의 주된 핵심은 바로 20세기에 들어 개신교내에서 첨예한 신학적 대립의 구도를 보이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교회의 지도자적 위치에 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여성 목회자 안수에 관한 문제가 논의의 중심이다. 그리고 책의 제목 '복음주의 페미니즘'은 바로 20세기 초중반부터 거세어진 신학적 자유주의(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부인하는 사상체계)의 영향 아래 복음주의 교단 안에서 벌어지는 여성 목회자 안수와 지도자적 위치에 대한 허용을 인정하려고 하는 시도들에 대한 신조어로서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인 웨인 그루뎀 교수는 이러한 복음주의 교단 내에서 벌어지는 복음주의 페미니즘이 왜 성경적으로 잘못되었고 그것이 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에 반하는 배교적 사상인지에 대해 성경과 신학, 전통과 역사적인 모든 분야의 자료와 고증을 통해 입증하고, 경고하기 위해서 이 책을 집필했다.
책은 크게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여성의 성직 안수에 대한 승인과 자유주의의 역사적 연관성,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거나 부인하는 복음주의 페미니즘의 다양한 견해들, 논거가 희박하거나 거짓된 주장에 근거한 복음주의 페미니즘의 견해들, 복음주의 페미니즘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그런데 우선 독자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할 2가지 중요한 개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평등주의와 상호보완주의이다. 평등주의는 말 그대로 성경은 교회와 가정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위치와 지위, 사역의 역할 등에 대해서 구분을 두지 않는다라는 주장으로서 다름아닌 복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주된 사상이다. 반면 상호보완주의는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가치를 지니지만 교회와 가정 안에서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이 주신 고유한 위치와 지위를 가지며 사역에 있어서도 역할의 차이와 구분이 있음을 말하는 전통적인 복음적 개혁주의의 주장이다. 이러한 일련의 기본적인 용어를 이해하고 책을 읽어내려가다보면 각 진영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전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상황 속에서 절대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상대성과 관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시대조류의 영향은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 시도된 여성 성직 안수는 이후 복음주의 교단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면서 남여의 성경적 동등성을 주장하는 동등주의로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일부 복음주의 진영의 급진적인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급기야는 미국 내 적지 않은 복음주의 교단과 교회들이 여성 성직 안수를 승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저자는 책을 통해서 여성 성직 안수의 문제가 분명 하나님께서 성경의 말씀을 통해 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훼손하면서까지 강행하는 복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행보에 대해 큰 우려와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저자는 책을 통해 평등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두 자유주의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평등주의자들이 구사하는 논리가 성경의 권위를 거듭 훼손하며 교회를 점차 신학적 자유주의로 이끄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임을 강조한다.
저자는 2부와 3부를 통해서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고 부인하는 복음주의 페미니즘의 견해들과 논거가 희박하거나 억측에 가까운 그들의 주장을 제시하며 탁월한 성경적 식견과 냉철한 신학적 통찰력으로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함으로서 복음주의 페미니즘의 오류를 여과없이 들춰내고 고발한다. 특별히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는 교회 내 여성들의 위치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가 가장 잘 드러난 성경 말씀이다. 그렇기에 이 성경의 내용은 복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가장 많이 변개하고 자의적 해석으로 훼손시키는 성경 말씀 중 하나이기에 저자는 매우 공들여서 그들의 반론에 대해 날카롭고 예리한 역반론을 펼치며 그들의 거센 공격을 방어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4부를 통해서는 그렇다면 이제 복음주의 페미니즘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가고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저자는 교회 내 여성 안수와 지도자적 위치를 승인하는 문제는 결국 교회를 신학적 자유주의로 이끄는 지름길임을 밝힌다. 왜냐하면 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교단과 교회들은 모두 여성 목사 안수 허용과 교단내 지도자 위치의 승인, 그리고 나아가서는 동성애 인정과 동성애자 목사 안수의 문제까지 승인한 상태에 와 있기에 그들의 전례를 고스란히 답습해가는 복음주의 페미니즘을 따르는 그들의 교단과 교회가 신학적 자유주의로 기우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결론부에서 결국 "궁극적으로는 성경이다!" 라는 의미심장한 한마디의 말을 남긴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무이한 당신의 말씀이며 그분의 말씀이 일점일획의 거짓이나 오류가 없는 무오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믿는 신자라면 무엇이 옳은 것인지 이 책을 통해서 분별해보기를 바란다는 바램도 덧붙이면서 말이다.
책을 덮으며 몇가지 상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우선 책을 읽는내내 저자인 웨인 그루뎀 교수의 그 신앙적 절개와 믿음 그리고 용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성경의 말씀을 왜곡하고 곡해하여 어떻게든 가정과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여성 성직 안수와 지도자적 위치를 동등하게 차지하려고하는 수 많은 복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거센 도전과 반론 앞에서 그가 너무나 외로워 보였다. 반면 상호보완주의를 지지하는 전통적 개혁주의자들의 목소리는 왜이리 작을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웨인 그루뎀이 밀려오는 좌경화된 사상의 물결에 맞서 성경의 절대성과 유일성, 무오성을 수호하기 위해서 정말 몸이 바스라지는 지성적 헌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찌할 수 없는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진중한 부르심 앞에 순종하여 연구실에 앉아 몰려오는 반대와 저항의 압력 속에서 본서를 집필해갔을 저자의 뒷모습 속에서 교황주의자들을 비롯한 수 많은 대적자들에 둘러싸여 죽음의 위협 앞에서 성경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의 전 삶을 불태운 하나님의 사람 존 칼빈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아침이다.
순전한 기독교
오래 전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함께 즐겨보았던 영화 중 <나니아 연대기> 라는 판타지 영화가 있다. 화려한 CG와 판타지 영화 특유의 색채감, 탄탄한 스토리가 관객들을 사로잡았고, 입소문을 타서 적지 않은 관객을 동원했다.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다소 식상할 만한 전통적 플롯이었지만 판타지 영화 자체가 가지는 매력 덕분에 국내 관객 200만명이 넘었을 정도로 선전한 외화다. 그런데 이 영화의 원작을 쓴 사람이 바로 오늘 리뷰하게 되는 책의 저자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영화와 원작자와의 이질적인 느낌을 뒤로 한채 책을 집어든다.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순전하지 않은 일부 개신교인들로 인해 순전해야 할 개신교가 작금의 시대처럼 갖은 비난과 오명을 뒤집어 쓴 적도 드문 시대에 살고 있다. 코로나19라는 전세계적 팬데믹 현상 앞에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일부 몰지각한 개신교의 비뚤어진 이기심의 발로는 참으로 추하다. 이러한 시기에 오래 전 출간되었던 지금의 기독교 아니 개신교가 처한 상황과는 반대로 순전함을 간직한 기독교에 대한 탁월한 변증서 한권을 만난다. 아일랜드 출신으로 영국의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이며 학자였던 C.S.루이스가 집필한 너무나 유명한 저작, <순전한 기독교>이다.
무신론자였던 C.S.루이스는 1929년 기독교로 회심한 직후 날카롭고 차가운 지성과 빼어난 문학적 문체로 이루어진 다수의 저작들을 남겼는데 그중에서 본서는 단연코 루이스 저작의 백미라 평할 수 있는 최고의 저작 중 하나다. 루이스는 본서를 통해 회심한 직후 자신이 새롭게 받아들이게 된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 대해 신은 없다라고 외치는 세상에 대해 그의 지성과 문학적 역량을 동원하여 치밀한 논리로서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하고 변론한다.
루이스는 이 책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신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이유와 자신의 입장을 간략히 설명한다. 전문적인 신학자가 아니었기에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어떠한 교리나 이슈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독자들에게 미리 언질을 해놓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더불어 이 책이 개신교의 여러 교단들 뿐 아니라 로마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회와 같은 기독교 전체가 가지는 공통적인 신학적 물음에 대한 공통분모를 염두했음을 밝힌다. 그러면서 <순전한 기독교>는 여러 방으로 통하는 현관 마루일 뿐이라고 덧붙인다. 다양한 기독교의 방으로 들어가기에 앞서서 내가 진짜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방으로 가기 위해서 잠시 머물러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인 현관 마루로서의 기능을 자신의 책이 감당해주길 기대한다. 그리고 이 책을 집어든 독자들에게 또한 자신의 책이 가진 소임을 그 정도로만 생각해달라는 겸손을 구한다. 그러나 실제로 본서가 가지는 가치는 그 이상이다.
그가 본서를 통해 말하는 기본적인 진리는 옮고 그름의 문제 속에서 발견되는 인간 본성의 법칙, 그리스도인이 믿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 그리스도인들의 행동 즉, 도덕적 요소로서 바른 신자라면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옳은지에 관한 실천적 제안들, 마지막으로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첫걸음으로서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신학과 교리적 지식에 대한 내용들로 구성된다.
신앙을 갖는다는 의미와 그 신앙이 개별적 존재인 신자의 삶의 지평 속에서 어떠한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지에 관한 명쾌함이 엿보인다. 신앙의 합리성과 도덕성이 결여된 이 시대에 본서의 메시지가 가지는 영향력은 과소평가 할 수 없다. 루이스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설명하는 내용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선해지지 않는 한 사회는 좋아질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을 포함한 인간 전체에 대한 고찰이다. 하지만 나는 책을 통해 어쩌면 저자인 루이스의 메시지가 가리키는 지향점은 기독교인이라는 더 특정한 사람들을 향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개별 인간의 내면이 근본적으로 선하게 변하지 않는 한 사회는 좋아질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지만 그러한 어둠과 절망이 예견되는 상황 속에서 빛을 밝혀 어둠을 내어쫓고, 악취가 나는 곳에 향기를 발할 수 있는 인간 집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순전한 기독교인들이 아닐까?
세상은 더 이상 기독교 특별히 개신교에 대해서 희망을 품지 않는다. 개신교가 가지는 도덕적 합리성에 대한 의문과 의심이 충만하기에 더 이상 기대할 만한 선한 것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개신교의 비합리적 현실 속에서 마지막 대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새 사람이 되는 것, 자기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을 뜻한다. 이는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그의 뜻이 우리의 뜻이 되고, 그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 되어야 한다는 것, 상투적인 복음송의 가사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사가 의미하는 바가 신자들의 삶의 실재와 부딪칠 때 파생될 엄청난 파급력을 생각하면 순전한 기독교의 추구가 완전히 요원한 일만도 아니다.
틸리 서양철학사
오늘 아침 N번방 사건 공범인 피의자의 신상이 공개되었다. 아직 교복이 어울릴만한 애띤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한 18세 청소년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자들의 질문 공세 속에서 도대체 지금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사태의 심각성이나마 제대로 파악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어린이들을 포함한 다수 여성의 육체와 정신을 유린한 이 짐승같은 존재들의 민낯을 보며 인간 존재와 그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 상존하는 인간성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되는 아침이다. 도대체 무엇이 저들을 이런 끔찍한 괴물들로 만들었을까?
이러한 질문 앞에서 활자 크기 10포인트 800여페이지의 분량만으로도 독자들의 기를 죽이는 어마무시한 철학서 한권을 만난다. 철학의 명문 프린스턴 대학교의 철학교수를 지낸 '프랭크 틸리' 교수에 의해 1914년 초판 발행된 <틸리 서양철학사>이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 일단 고대 동양 철학과 사상은 사유 체계가 명확하게 성립되지 않았기에 배제하고, 개인과 국가, 사회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 철학과 사상에 대해서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부터 근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철학과 사상의 흐름을 각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들과 그들의 이론을 바탕으로 나열했음을 밝힌다.
인류의 태동 이후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우주와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의심 속에서 그것의 기원과 구조, 기능을 탐구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유의 작업을 해나갔다. 저자는 한 철학의 역사적 기원과 개인적 동기, 하나의 철학 체계는 한 개별 지성의 창조적 사유의 산물이며 그 창시자의 인격을 반영한다라고 말했다. 즉 다른 이들보다 좀 더 깊은 생각과 탐구의 정신을 지닌 그 시대의 지성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물음 앞에서 답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으며 그것에는 자연스럽게 나름의 답을 발견한 하나의 철학 체계를 형성한 지성인들의 인격이 고스란히 반영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책을 통해 저자가 강조하는 바는 철학이라는 것이 오직 자신만의 세대가 가진 물음과 그에 대한 답변으로서 종결되는 한계성에 그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창의적 철학자는 동시대의 다양한 영역에서의 새로운 개념들과 더불어 과거 철학사로부터 이끌어 낸 전통적 개념과 통찰을 살찌워야 한다는 것이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기에 진정한 철학은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문제와 그것에 대한 정답만이 최고라는 오만을 견제할 때 더욱 더 풍요로운 사유 체계의 완성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방금 위의 이야기와 같이 각 시대와 세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들과 그들의 철학 사상이 독단적인 움직임 속에서 역사적 단절성을 갖는 것을 철저히 배제하고 자신들의 앞 시대를 살다간 선배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유에 대한 직간접적인 연관성을 추구했음을 너무나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독자는 유독 하나의 시대 정신만이 한권의 책을 관통한다고 볼 수는 없고 각 시대마다의 철학 사상들이 마치 유아용 토마스 기차 장난감과 같이 어느 정도의 연결성을 이루며 진행됨을 발견할 수 있다.
총 22장으로 구성된 본서는 1장 자연철학부터 22장 실용주의 실증주의 분석철학까지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 사상을 앞뒤의 사상체계들과의 시대적 연관성을 무시하지 않은 채 매우 깊이 있게 서술하고 있다. 사실 나와 같은 철학의 문외한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철학의 범주에서부터 철학의 기원을 생각하길 좋아한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의 그 난해함을 굳이 이해하기 위해서 통과해야만 하는 그 지난한 정신적 사유의 과정들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기에 중세철학이나 근대 계몽주의 철학과 같은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철학 사조들과는 달리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 철학자들에 관한 그들의 사상과 이론에 대해서 좀 더 심도있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귀한 이득이었다.
밀레토스 학파 또는 이오니아의 자연 과학자들로 불리는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이 세상의 실체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그들 사유의 소재로 삼았다. 초기 고대 철학자들은 대부분 과학자들이었다. 만물의 질료이며 원초적 재료는 물이기에 만물은 물로 시작해서 물로 돌아간다고 주장했던 탈레스나 생물의 기원을 밝히며 사람은 원래 물고기였음을 주장하며 마치 이후 다윈 진화론의 고전판 버전과 같은 사유를 설파하기도 한 아낙시만드로스 그리고 사물들의 제일 원리이며 근본실체는 공기, 증기, 안개이며 공기는 생명의 원리이자 우주의 원리임을 주장한 아낙시메네스까지 어찌보면 우리가 먹고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 모르고 살아도 하등 문제 없고, 지장없는 마치 개똥 철학같은 이야기들을 매우 심도있게 나열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 철학자들이 관심있게 궁구한 우주와 세계의 실체의 문제는 당장 우리네 삶에 큰 연관성이 없다할 수 있지만 인간 존재의 문제와 연결될 때 그렇게 만만하고 쉽게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는 다소 심각한 이슈가 될 여지가 충분한 철학적 주제들을 끄집어온다.
예를 들어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세계를 구성하는 실체의 문제는 무엇이며 그 세계와 우주를 구성하는 자연과 인간은 무엇이며 그것이 인간과 맺는 관계에 대한 모든 사유의 물음을 차단해버리고 당장의 배고픔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의식주의 문제에만 매달린다면 인간은 한낱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한 물고기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주의 기원도 모르고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조차 모르며 인간 존재의 기원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때의 결과는 지금 현시대가 맞닥뜨린 각종 윤리적 문제들과 결코 관련없지 않다. 전쟁, 폭력, 살인, 강간, 낙태, 아동 성매매, 인종청소, 유아살해, 장기밀매, 안락사, 동성애, 식인풍습, 유전자 조작, 대리모 출산 등 현대 우리 사회가 겪는 수 많은 난제들에 대해 그것이 오직 독립적으로 발생한 시대의 아픔이라고 말하는 것만큼 무지한 답변은 없다.
자연철학으로부터 시작된 우주의 생성과 기원의 문제는 인간과 신 존재의 증명을 요구하며 종교와 중세철학의 시대로 바통을 넘겼다. 이후 신 존재의 증명을 둘러 싼 끊임없는 종교적 논쟁은 다시 인간성 회복이라는 지성과 이성의 시대인 계몽주의 근대 철학에 그 철학적 사유의 주도권을 넘긴다. 종교에 대한 이성의 탁월함을 맹신했던 인간은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저지른 그 끔찍한 전쟁의 참혹성을 통해 다시금 인간 이성의 무한 맹신이라는 화려한 망상을 떨쳐버리기에 이른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있은 후 인간 정신과 철학의 무대는 전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상대성의 인정과 다원화라는 새시대를 맞이하기에 이른다. 이제 인간은 신 존재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인간 지성과 이성에 대한 맹신도 거부한다. 오히려 과학기술이 새로운 인간 문명의 총아로서 떠오른 현대인들에게는 편리함과 그로 인한 즐거움, 효율성이라는 최고의 철학적 주제가 대세다. 그렇기에 효율성의 측면에서 장기매매가 이루어지며 돈을 벌기 위해서 불법 낙태를 시술하고 안락사를 시행하는 의료인들이 존재하고,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라도 불멸의 삶을 꿈꾸기에 이르렀다.
본서는 단순히 서양철학사의 시대적이며 연대기적인 나열로서 이루어진 책이 아니다. 고대 자연주의 철학의 시대부터 근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대표적 철학사상과 철학가들이 그들이 살던 당시의 사회, 정치, 문화적 정황 속에서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에 관한 논의가 주를 이룬다. 그렇기에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다소 어려울 수도 있는 내용은 잠시 이해의 과정을 스킵하고 넘어간다해도 이후의 논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크나큰 어려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특별히 틸리 교수가 철학적 논의를 심술궂게 비꼬아서 표현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문체의 명확함과 명료함으로 인해 다른 책들보다는 표현에 있어 매끄럽게 다가오는 철학서이다.
10여일간 벽돌과 같은 책 한권에 파묻혀서 사고의 바다 속에서 허우적댔다. 영원한 이국의 언어와 같은 철학. 잠간 농담과 같이 표현했지만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세상 속에서 철학을 모른다고 실제로 밥 벌어 먹고 사는데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는 관념적 학문으로서의 철학. 그러나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배부르고 등 따시면 된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는 그 시대 어르신들의 시대적 유물로서 잠시 밀어놓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좀 더 생각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자연 철학자들과 같이 거창하게 우주와 세계를 논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나와 내 이웃과의 관계라는 협의적 의미에서 인간 실존의 문제를 좀 더 심각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지금과 같은 시대만큼 필요한 때가 또 있을까싶다. 자기가 왜 태어났고 본인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며 나를 둘러싼 내 이웃들의 존재와 그들 하나하나의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멈췄을 때 리뷰의 서두에서 이야기한 N번방의 괴물들이 탄생한다. 완연해가는 봄 기운 속에 이번 시즌에는 우리 모두 가벼운 책들을 좀 내려놓고 머리에 쥐가 날 수도 있는 고생스러움을 선택함으로서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한 물고기가 아님을 증명해보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