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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깨어진 관계의 회복, 기독교강요, 아무도 말하지 않는 죄

by 독서블로그123 2024.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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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관계의 회복

세상을 살아가면서 특별히 사회 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일까? 직장에서 일하는 것도 어렵고, 장사나 사업을 운영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일도 만만치 않고, 새로운 기술을 연마하고 배우는 일도 녹록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사 모든 일들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일이 하나 있으니 바로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이다.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과의 접촉 없이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물론 히키코모리라 불리는 은둔형 외톨이와 같이 방구석에 쳐박혀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병적인 인간형태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정상적 범주에 포함됨으로 여기에서는 논외이다.

 

그렇기에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알려진 J.D. 샐린저를 모델로 했다고 하는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속 전설적 은둔의 작가 포레스터와 같이 집안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않고 자신만의 성을 구축한 사람들도 언젠가는 다시금 세상 속으로 나오는 것을 볼 때 인간은 누구나 관계의 연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인간 관계라는 것이 도통 쉽지 않은 영역이다. 나와 코드가 맞고 내 성향에 맞는 사람과는 한없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지만 나와 조금이라도 맞지 않고 오히려 다른 부분이 많음을 발견하게 될 때 관계는 지옥 그 자체이다. 가정 안에서 나와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배우자와의 관계, 자녀들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 상사와 부하 직원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등은 더 실제적인 어려움으로 다가온다.

 

이렇듯 결코 쉽사리 다가가기 어려운 관계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을 보여주는 책 한권이 있다. <깨어진 관계의 회복>이라는 책인데 출판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 <관계>라고 책 제목이 바뀌면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물론 내용은 같다. 리더십과 경영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 성경 교사 '탐 마샬'이 관계에 대한 유익한 내용을 책에 담았다. 독자 포인트는 관계의 깨어짐을 만난 사람들을 향한다. 자신의 관계가 왜? 이렇게 힘들고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데에 있어서 작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책이다.

 

책은 하나님께서 고안하신 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정의와 개념, 기능을 알게 됨으로서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좀더 쉽고 명확한 해답을 제시 받을 수 있는 일종의 솔루션 북이다. 관계에 있어서 사랑, 신뢰, 존경, 이해라는 각각의 무형적 가치가 가지는 성경적 의미는 자신의 관계가 어떠한 어려움에 봉착했는지 그 문제점과 누수의 원인을 찾아들어가도록 돕는다. 기독교 상담자가 저술한 책 답게 당연히 이 책은 기독교적이고 성경적이다. 모든 문제에 있어서 원인과 해답을 성경에서 찾는다. 관계를 파손시키는 원인은 무엇이며 우리가 신자로서 화목을 추구해야만 하는 이유와 방법에 대해서도 기술한다. 신자라면 화해와 화목이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오래 전 내가 이 책을 접했을 당시 교회에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던 냉냉한 기운이 더이상 사람들과의 관계 회복의 의욕을 상실케 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책은 내 안에 올바른 관계의 모습을 보게했고 그것이 나의 노력만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님을 알게 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관계를 고안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다. 각 장마다 오랜 임상 경험에서 우러나온 저자의 탁월한 통찰력을 통해서 독자는 너무나 쉽게 그리고 실제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단, 이 책은 빨리 책장을 넘기지 말고 천천히 정독할 것을 권한다. 내가 느끼는 '탐 마샬' 의 책은 속독보다는 정독하며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러나 본서를 읽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깨닫는 것은 깨어진 관계에 있어서 제시되는 수많은 실제적인 방법들은 한가지 중요한 것이 빠진다면 별로 의미가 없다는 나만의 해답을 발견하게 된다. 아무리 관계 회복을 위한 탁월한 식견을 소유한 영적 지도자들이 쓴 책을 수십권 읽는다치더라도 결국 그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key는 결국 관계가 깨어진 당사자들의 자발적인 겸손과 용서의 마음을 품는 능동적 의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쉽게 말해서 상대방에게 나의 자존심을 죽이며 먼저 숙이고 들어가려고 하는 겸손한 의지 자체가 없다면 이러한 종류의 책들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소용없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관계는 예술이라는 말이 있다. 한손에는 망치를 들고 또 한손에는 정을 들고 정교한 조각품을 다듬고 깍아서 하나의 아름답고 훌륭한 예술품을 탄생시키듯 관계를 만들어가는 당사자들은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이렇듯 아름답게 만들어가야 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혹 나의 부주의든 아니면 상대의 실수든 간에 관계의 깨어짐을 겪는다면 또 다시 망치와 정을 잡고 부서지고 깨어진 부분을 다시한 번 깍고 다듬어서 원래의 모습에 가까운 형상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겸손을 동반한 지난한 작업을 재개해야 한다. 물론 관계가 깨지기 전의 완전한 모습으로 돌아가기는 어렵겠지만서도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발적 순종에 기인한 노력과 함께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가 주어질 때 깨어진 관계의 회복은 요원한 일만은 아니다.

 

 

기독교강요

개혁주의 신학을 집대성한 대작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 두번째 책이다. 본서의 첫번째 책에서 저자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즉 신론과 기독론에 대한 그의 신학적 지식의 역량을 십분 발휘했다면 두번째 책을 통해서는 칭의를 비롯한 종교개혁 이후 교회 안에서 항상 뜨거운 화두로 등장했던 선택과 작정, 예정 교리, 그리고 종말에 관한 그의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식견을 설파하고 있다. 특별히 선택과 예정에 관한 교리는 매 시대마다 교회 안에서 첨예한 신학적 갈등과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주제였기에 나 또한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흥미롭게 읽어내려가게 된 부분이다. 특별히 장로교 개혁주의 전통 가운데 있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성경 곳곳에서 명확하게 증명되어지고 있는 선택과 예정의 교리에 대해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불온한 사상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개혁주의 신학을 만나기 전에는 그러한 사람들 중 하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기에 최대한 객관적 독자의 입장에서(물론 그렇다해도 이미 나의 사고와 신학적 틀이 고착화 되어버렸기에 설득력이 떨어짐을 기꺼이 인정한다)저자의 주장들을 평가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임과 동시에 발견하고 깨닫는 사실은 선택과 예정의 교리를 통해 우리는 우리 인간의 그 한평 남짓한 편협하고 제한적인 사고와 지성, 이성의 능력과 역량의 결핍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대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 역사하심, 그리고 그분의 주권에 대한 경외심 앞에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유아적 한계를 경험하며 무릎 꿇을 수 밖에 없더라는 것이다.

 

본서를 접하며 적어도 나는 그랬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인생과 내 주변 사람들의 인생을 관망할 때 삶 속에서 내가 나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침에 일어나 마른 입속에 힘겹게 한술 뜨는 것 뿐이라고 여겼던 일조차 결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발견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선택과 예정의 교리는 어쩌면 내게 절대자의 그 절대 주권 앞에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놀랄만한 자각과 함께 실제적 확증으로 다가온다.

 

혹자는 본서의 저자인 칼빈과 선택, 예정의 교리를 하나님을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인간을 가혹하게 다루는 다중인격 미치광이 폭군으로 만들어 버리는 가장 불경스러운 이단적 사상이며 칼빈은 지옥에 떨어진 이단자라고 혹평한다. 그러한 평가는 지금까지 교회 역사 가운데 있어왔고, 지금도 물론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거룩함이라고는 눈씻고 찾아볼 수 없는 자신의 부패한 본성과 비천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와 절대 주권의 신비와 아름다움은 가히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선택과 작정, 예정의 교리는 바로 그 하나님의 섭리와 절대 주권의 영역 속에 있는 그분의 고유한 권한이라는 명확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 누구는 구원받도록 예정하셨고, 누구는 영벌에 처하도록 버려두셨다는 선택과 유기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많은 신자들은 공통적으로 하나님께서 너무나 불공평하신 분임을 토로한다. 나 또한 그랬다. 아무리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영역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닌가?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어 내려가면서 나의 이러한 생각들은 그동안 오랜 세월 신앙 생활 했다고 자부했던 나의 믿음과 신앙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초라하고 빈약한지에 대해 깨닫도록 만든다. 조금 안다고 으스대었던 나의 교만한 모습이 떠올라 어찌나 부끄럽던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의 신학적 무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험은 마치 사람들 앞에서 내가 벌거벗은 몸으로 서 있는 것 마냥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경험 그 자체였다.

 

지금도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의 교리에 대해서 혼란스러워하고, 마음 어려워하는 신자들이 있다면 나는 기독교 강요를 천천히 읽어보라 말하고 싶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본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는 개념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이해이다. 즉 아담 이후 모든 인류는 죄악으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인간이 영벌에 처해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한 결과였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중에서 당신의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얻을 자들을 선택하셨고,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제물로 내어주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이며 복음이다.

 

다시말해서 어차피 모든 사람은 죄악의 댓가로 영벌에 처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중에서 소수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나머지 사람들은 영벌에 처하도록 내버려두셨다. 그렇기에 어차피 내버려두면 모두 영벌에 처해질 피조물 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이러한 선택과 예정에 대해서 불의함을 호소하며 비난할 수 있는 어떠한 권리도 없다. 그렇기에 구원 받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 선택과 예정의 교리는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를 구원으로 끌고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양할 수 밖에 없는 깊은 감사와 은혜의 교리인 것이다.

 

어찌보면 본서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교리를 체계화시킨 저작이지만 동시에 칼빈 당시의 신학적 이슈에 대한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같은 대적자들에 대해 바른 정통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기독교 변증서와 같은 역할 또한 감당했으리라 여겨진다. 반론과 역반론의 치열한 신학적 논쟁 속에서 바른 개혁주의 정통신앙과 참된 진리를 향한 저자의 그 불사르는 듯한 열정과 혈관을 얼어붙게 만드는 듯한 냉철한 지성적 헌신은 저자 존 칼빈의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경외의 극치를 보여준다.

 

칼빈은 믿음을 설명하면서 아무런 깨달음 없이 그저 느낌을 교회에 맹목적으로 굴복시키기만 하는 것이 과연 믿음인지에 대해서 묻는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믿음은 무지가 아니라 지식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강조한다. 본서를 통해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헤아릴 수 없는 섭리, 그리고 그분의 누구에게도 양보치 않으시는 절대 주권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물음과 의문을 지울 수 없는가?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 지식에 대해서 만큼은 절대포기하지 말고 묻고 또 물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의 지성과 이성의 범위를 뛰어넘어야 할 그 때를 만난다면 그러한 독자들은 저자인 존 칼빈이 그의 평생의 영적 스승으로 여겼던 '아우구스티누스'의 한마디를 상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죄

요즘 우리 사회에 가장 큰 화두는 코로나19이다. 그런데 요 몇일 전부터 코로나19에 대한 기사만큼이나 뉴스의 한면을 장식하고 있는 사건이 하나있으니 그것이 바로 '박사방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다. 여성들의 약점을 잡아서 나체 사진을 요구하고 그것을 텔레그램이라는 폐쇄적인 SNS에 유포하여 이것을 보러 오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가상화폐를 받고 제공한 전형적인 사이버 성범죄 사건으로 피해 여성들만 74명이고, 그중에는 16명의 청소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천인공노할 범죄의 주범이 오늘 아침 경찰의 포토라인 앞에서 얼굴이 공개되었다. 그는 기자들에게 자신의 악마적인 삶을 멈춰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와치맨, 갓갓 N번방, 박사방 등을 방문하여 돈을 지불하고 여성들의 나체를 탐닉한 사람들만 24만명이라고 하니 도대체 이 범죄의 끝은 어디인가? 이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성적으로 타락했고, 육체적 문란함이 도를 넘어섰다는 반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음란함을 부추기는 이 육적인 사회 속에서 그들에게는 피해 여성들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여성들의 육체만을 게걸스럽게 탐하는 괴물같은 짐승의 본능만이 가득했다.

 

이러한 시점에 한권의 책을 만난다. 책의 제목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 죄>.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중독이라는 말은 이제 너무나 흔한 말로 여겨진다. 알콜중독, 약물중독, 인터넷중독, 게임중독, TV중독, 음식중독, 관계중독 등등... 하지만 이 책은 '성(性)중독' 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성(性)은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거절하거나 피하기 어려운 달콤한 유혹이자 매우 강력한 중독적 대상이다. 그것은 최고의 향락과 육체의 말초적 쾌락을 만족시키기를 원하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거부할 수 없는 마성적 유혹으로 다가온다.

 

본서는 이렇게 성에 중독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책은 총 3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에서는 은밀한 죄인 성중독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통해서 성중독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고 성중독은 어떻게 생겨나는지 그리고 성중독의 유형과 특징, 성에 중독된 기독교 사역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상세하게 나열된다. 또한 2부에서는 성중독자들이 대부분 어린 시절 병적이고 역기능적인 가정에서부터 성적으로 학대받으면서 자라왔음을 밝히며 성중독의 뿌리를 살핀다.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성에 중독된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 실제적인 치료책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리뷰의 서두에서 밝혔던 주도적 성범죄자들과 그 영상을 돈을 내고 공유하며 탐닉한 동조자들 모두 성중독자들임이 확실하다. 여성들의 인권과 영혼육을 유린하면서까지 그 안에서 극도의 동물적 쾌감을 느낀 이 가학적 성애자들은 성에 중독되어 외모는 멀쩡하지만 내면은 오직 섹스만을 갈망하는 짐승 이하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어디 이들 뿐인가? 드러나지 않고 발각되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 사회는 다른이들의 몸을 탐하는 관능과 욕정이 넘치는 사회가 된 지 오래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성중독을 떨치고 일어나도록 돕는 본서와 같은 책의 발간은 귀하기만 하다.

 

본서의 저자는 성중독의 원인과 폐해를 여러가지 예화를 통해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성중독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들과 실제적인 프로그램들을 제시한다. 책을 읽으면서 놀라운 사실 한가지를 발견하게 되는 데 그것은 다름아닌 책의 내용에 등장하는 촉망받는 한 젊은 목회자가 성중독에 빠져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 속 목회자가 바로 저자인 마크 레이저 본인이었다. 저자는 자신도 한때는 성중독에 빠졌던 사람임을 고백한다. 그리고 지금은 그러한 성중독을 이겨내고 '상처입은 치유자'로서 자신과 같이 성중독으로 인해 고민하며 삶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는 성중독 치유 상담사역자로 사역하고 있음을 밝힌다. 영적인 권위를 이용한 그루밍 성범죄로 통하는 기독교계 교회 지도자들인 목회자들과 유명 선교단체 선교사들의 성적 비행은 이제 별로 특별한 뉴스거리가 아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목회자로서 성중독자의 경험을 가진 본서의 저자가 말하는 이 책의 내용은 더 실제적으로 다가온다.

 

책을 읽으면서 보통 성중독은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인해 남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수많은 독자들이 읽게 되는 책을 통해 공개적으로 오픈한 저자의 용기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것도 목회자로서 말이다. 그만큼 책은 성중독으로 말못할 고민과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당신도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실제적인 원인과 폐해, 그리고 치유 프로그램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열거한 어떠한 중독보다도 가장 강력한 중독이 바로 성중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마트폰을 켜고 몇번의 클릭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수 많은 음란물을 접할 수 있는 이 타락한 세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정말 영혼육의 순결함과 거룩함을 지켜나가기 위한 싸움은 지난하기만 하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비아냥과 조롱거리가 되어버리는 이 패역하고 음란한 세대 속에서 성중독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아파하는 자들에게 본서는 매우 실제적인 도움을 제공하리라 본다. 더불어 성으로부터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이 시대에 꼭 맞는 책이 출간되었기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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