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교회사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이 있다. 명배우 '숀 코넬리' 가 주연으로 분하여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의 배경은 14세기 초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으로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살인사건을 토대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린 시절 TV에서 방영하는 영화를 얼핏 보고나서 적지 않은 충격과 두려움을 느꼈던 감정은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가지는 그 암울함의 색채에 기인한다. 지금 기억으로는 영화의 전체적인 배경이 되는 중세 수도원의 그 어둡고 음침하며 음산한 기운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마음 속에 불쾌함으로 엄습했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중세 시대의 종교적 색감과 분위기는 암울함의 네거티브적인 느낌으로 나의 내면 안에 각인되어 있다.
유럽 중세시대에 대한 이러한 느낌을 가지고서 펼쳐든 책은 지난번 내게 깊은 인사이트를 선사했던 <이것이 교회사다 : 진리의 보고> 초대교회사편에 이은 <이것이 교회사다 : 묻어둔 진리> 중세교회사편이다. 총신대학교에서 역사신학 교수로 교편을 잡고 있는 탁월한 개혁주의 신학자 라은성 교수가 집필한 저작으로서 중세 교회 역사를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이렇게 쉽고 흥미롭게 기술한 저작은 아마 드물 것이다.
본서는 로마제국에 의한 지난한 기독교 박해의 시대가 끝난 시점 이후로 대략 AD 5세기말부터 15세기말, 16세기 초까지 대략 1000년의 시간을 가리켜 중세시대로 명명한다. 초대 교회의 역사는 교회에 대한 로마제국의 길고도 잔인한 박해와 각종 이단들의 출현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진리를 변증하고 수호하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송두리채 던진 위대한 교부들의 삶으로 대변된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찬란한 보석과 같은 성경의 진리들은 마치 그 시대가 '진리의 보고' 로서 묘사될 정도로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와 교부들의 삶을 통해 빛났다. 이러한 진리의 보고와 같았던 초대 교회 시대가 끝나고 교회는 서평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어둡고 암울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과 같은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중세 교회 시대이다. 초대 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진리의 찬란한 영광을 잃어버린 채 중세 교회 역사 속에서 교황과 로마 카톨릭에 의해 대변되어지는 그야말로 진리의 빛이 사라진 기나긴 암흑의 시대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를 가리켜 저자는 빛된 진리들이 땅 속에 철저하게 묻혀져 버렸음을 통탄하며 '묻어둔 진리' 의 시대라고 표현한다.
중세 교회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독자는 먼저 핵심적인 주제를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교황제도'이다. 그리고 이 교황제도를 지지하는 3가지의 기둥으로서 수도원 운동, 십자군 운동, 스콜라주의를 꼽는다. 이들은 책의 전면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들로서 독자들이 완독을 위해서 필히 기억하고 있어야 할 요소들이다.
언젠가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니 카톨릭은 큰집 또는 형, 개신교는 작은집 또는 아우 같은 개념이 아니겠는가? 하는 이야기였다. 교회사를 모르기에 무식함의 극치를 드러내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본서의 초반부에 이에 대한 저자의 명확한 설명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반색하며 읽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에서 한 분파를 형성한 개혁이 아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추악한 부패상들을 지우거나 없애고자 한 것도 아니며 단지 그들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초대 교회의 정통신앙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바로 종교개혁이었음을 일갈하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그렇다면 왜 우리가 개신교와는 상관 없어보이는 로마 카톨릭의 부패와 타락의 민낯을 보게 되는 중세교회사를 배워야 하는 지에 대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1000년의 암흑 시대 속에서도 초대 교회 정통 신앙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무명의 개혁자들과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저자는 이렇게 작은 믿음의 그루터기 같은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정통신앙의 빛을 이어오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은혜의 역사들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중세교회사를 간과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베드로가 로마의 감독이었다는 주장을 통해서 로마 감독이 지상 교회의 지상권을 갖는다는 얼토당토한 주장으로부터 출발한 교황제도는 정교 유착, 성직 매매, 성직 수임권 논쟁, 송장회의, 창부정치, 족벌제도, 각종 음모와 폭력과 살인, 암살, 성적타락과 재물에 대한 말할 수 없는 탐욕, 3명의 교황으로 인한 분열과 혼란 등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패와 타락의 극치를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교황제도를 지지했던 기둥 가운데 하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교회의 타락을 견제하고 정화하기 위해서 탄생한 '수도원 운동' 이었다. 교회의 부패상을 보며 바른 신앙과 경건을 진작하기 위해 탄생한 초기의 수도원 운동은 처음에는 나름 건전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이어져갔지만 시간이 흘러 몸의 훈련이라는 외식적인 주제에 대한 관심 속에 영적으로 급격히 타락해간다. 그리고 마침내 수도원의 수사들이 제도권 교회 안으로 들어가 사제가 되면서 수도원 운동이 가진 건강하지 못한 영적 영향력들은 교회를 더욱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아울러 외적인 운동과 인위적인 프로그램으로는 결코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이겨내고 바른 교회의 개혁을 실천할 수 없음이 수도원 운동을 통해서 여실히 드러났다.
또 한가지 교황제도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두번째 기둥은 바로 '스콜라주의' 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스콜라주의는 한마디로 인간 이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인간 이성을 중시한 스콜라주의의 철학을 채택한 로마 카톨릭주의는 인간 이해를 위한 인본주의적 신학에 바탕을 둔다. 그러면서 나타나게 된 것이 바로 7성례, 교황무류성, 마리아 성모 몽천설 등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번째 기둥인 십자군 운동은 성지 탈환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출발했지만 결국 교황과 로마 카톨릭의 정치적 야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꼭두각시로 전락해버린 의미없고, 맹목적인 역사로서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중세시대 로마 카톨릭은 일반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금했다. 성경을 소유하는 것과 성경을 읽는 것이 죽음에 이를 정도로 매우 무거운 중죄였기에 일반적인 신자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을 뿐더라 소유할 수 조차 없었다. 또한 모든 성경은 일반인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라틴어 불가타역본이었으며 모든 미사는 자국어로 드려진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 행해졌기에 신자들은 결코 성경과 진리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았다. 진리는 로마 카톨릭 성직자 계급에 의해 철저하게 은폐되고 가려졌다. 마치 진리가 땅 속에 묻혀진 것 마냥 중세 1000년의 시대는 하나님의 성경과 그분의 말씀을 찾아 볼 수 없었던 암흑의 시대였다. 그렇기에 저자가 이 시대를 가리켜 '묻어둔 진리'의 시대라 명명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역사라는 반면 교사를 통해 지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된다. 한국 교회 또한 중세 로마 카톨릭이 자행했던 그 최악의 부패와 타락의 극치를 그대로 답습하며 그 전처를 밟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 있다. 주변 상권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는 대형마트의 횡포와 같이 지역의 작은 교회들을 배려하지 않는 초대형 교회들의 횡포는 말할 것도 없고, 대형 교회들의 담임 목회직 세습과 연이어 터지는 목회자들의 재정 비리와 성적 비행은 이제 일상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탐욕으로 물들고 욕망으로 점철된 현대 한국 교회의 모습과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의 암울한 모습이 묘하게 오버랩되어 마음이 아리다. 이러한 혼탁함 속에 무지한 양떼들은 무엇이 진리이며 비진리인지도 모른채 그냥 물흐르듯 그렇게 적당히 자조하며 살아간다.
정말 진리가 땅에 묻혀진 것만 같은 시대가 지금 시대인 것 같다. 신자로서 살아 숨쉬는 것 자체가 고문인 이러한 시대 속에서 진리에 대한 간절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간다. 혹자는 한국 교회가 제 2의 중세 암흑시대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한다. 아니 어쩌면 벌써 암흑 시대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책 한권을 대략 6개월 동안 챕터별로 되새김질 하듯 곱씹으며 읽어내려갔다. 책을 읽다 믿겨지지 않는 역사적 사실 앞에 도저히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허공을 응시하며 한숨 지은 적이 몇번인지 모른다. 조국 교회의 암울하고 어두운 현실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모습이 초라하기만 하다. 그러나 본서의 끝 부분에서 나는 새로운 한가닥 희망의 빛을 보며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존 위클리프, 얀 후스와 같은 전종교개혁자들의 진리를 향한 작은 몸부림과 결연한 외침 속에서 작은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터널을 통과해 본 사람은 안다. 어둡고 긴 터널의 끝에는 반드시 찬란한 빛이 기다리고 있음을 말이다.
전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의 초라한 날개짓이 무슨 결과를 가져올 지 몰랐다. 그리고 후대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준비하고 계셨음을 본서의 마지막을 통해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새벽 어둠이 깊으면 곧 여명이 밝아올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칠흑과 같이 깊은 어두움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으나 한가닥 희망이 있다. 그리고 그 한가닥 희망은 묻어둔 진리를 꺼내어 흙먼지를 털어내고, 정통 초대교회가 전해주는 진리를 재발견할 수 있는 '종교개혁' 이라는 그 소망과 고대함의 시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신앙인물시리즈 조지 뮬러
도서출판 예수전도단에서 출간된 '믿음의 영웅들'시리즈 2번째 주인공은 '평생 5만번의 실제적인 기도응답을 받은 사람', '브리스톨 고아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조지 뮬러'이다. 19세기 영국 브리스톨 지방에서 헐벗고 굶주린 고아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조지 뮬러의 삶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의 평생의 삶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했던 모범적 신앙인의 삶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청년시절 하나님을 우숩게 여기며 자신의 멋대로 사는 문제투성이의 불량청년이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도 없고 오직 술과 카드놀이에 빠져 온통 즐기고 노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형편없는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친구를 좇아간 한 작은 기도모임에서 하나님의 대한 이야기를 듣고난 후 그의 삶은 회심이라는 획기적 변화를 보이게 된다. 후에 해외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한 조지 뮬러는 선교사로서의 삶을 준비하다가 브리스톨 거리에서 한 고아 소녀를 만나게 된다. 꾀죄죄한 몰골의 다섯살 남짓한 소녀의 등에는 동생으로 보이는 갓난 아기가 업혀있었다. 어머니는 당시 영국을 휩쓸었던 콜레라로 목숨을 잃었고, 아버지는 금광을 찾아 집을 떠났다.
극심한 가난과 빈곤의 현장 속에서 돈을 구걸하는 이 가엾은 소녀가 조지 뮬러에게서 1실링을 받아 돌아가는 그 순간 조지 뮬러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놀랄만한 영적 깨달음이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해외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영국에 있는 불우한 고아들에게 있음을 깨닫고 영국에서 고아원을 만들어 수많은 고아들을 신앙안에서 돌보고 양육하는 사역을 감당하기에 이른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조지 뮬러의 가슴 속에 깊이 각인되어 그 이후 브리스톨 지방에 고아원 몇개를 더 건축함으로서 그는 수많은 거리의 고아들을 돌보는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그가 고아원을 운영하는 방식은 철저히 하나님께 기도로서 요구하고 공급받는 방식이었다. 고아원 건물을 건립하는 데 있어서부터 실제적인 고아원을 운영하는 작은 부분에 있어서까지 그는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기도로서 아뢰었다. 책 속에는 다양한 감동적 일화가 실려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해본다. 어느날 아침 아이들이 식사를 해야하는 시간이 되었는데 먹을 음식이 하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다. 식당 안에 빈접시를 앞에두고 앉아있는 300명의 아이들을 바라보며 조지 뮬러는 식사기도를 했다. "하나님! 곧 먹을 것을 보내 주실 줄 믿고 감사드립니다. 아멘!" 기도를 마쳤지만 아이들에게 어떻게 음식이 공급될 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 아이들을 굶기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만 믿을 뿐이었다. 잠시 후 누군가 고아원 문을 두드렸다. 동네 빵집 주인이 빵을 한가득 안고 서 있었다. 아이들에게 빵을 구워주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새벽부터 빵을 구웠다며 주고 갔다. 또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동네 우유 가게 주인이었다. 커다란 우유통 10개가 실린 수레바퀴가 고아원 건물 바로 앞에서 고장이 나버렸다. 수레바퀴를 고치려면 우유통을 내려서 처분해야 했기에 그는 아이들에게 우유를 나눔했다.
5만번의 실제적인 기도응답을 받은 그의 간증은 이외에도 수 없이 많다. 그는 일기에 이와 같이 적었다. "극복해야 할 난관이 클수록 기도와 믿음으로 얼마나 위대한 일이 이루어지는지 하나님이 선명하게 드러내심을 체험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뿐 아니라 더 차고 넘치도록 공급해 주신다."
조지 뮬러가 1898년 9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리버풀 머큐리'지는 "어떻게 그런 놀라운 일이 가능했는가? 조지 뮬러는 바로 '기도' 로 인해 가능했다고 전세계에 말했었다. 오늘날의 이성주의는 그 말을 비웃겠지만 사실은 엄연히 실재한다." 라고 말했다. 그는 63년간 만명의 고아들을 먹이고 입혔다. 너무나 큰 감동과 도전이 되는 그의 삶과 사역에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뜨거워졌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급급한 나의 욕심 가득한 삶을 돌아보게 된다. 책을 덮으며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에게나 일어나는 특수한 일이라고 손쉽게 치부해버릴 수 없는 것은 그러한 놀랄만한 일들이 워낙 보편적인 우리네 일상 속에서 벌어진 실제적인 일들 가운데서 나타났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때문이다. 너무나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했던 '고아들의 아버지 - 조지 뮬러'의 삶은 21세기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큰 도전으로 다가온다.
스님의 청소법
요즘 '미니멀 라이프' 라는 말이 대세이다. 정말 필요한 물건들만을 남겨두고 불필요하거나 당장 사용하지 않을 물건들은 필요한 이들에게 주거나 처분함으로서 자신의 삶의 환경을 간소화하고, 그로 인한 삶의 군더더기를 털어내고 인생을 라이트하게 살자는 의미가 담겨있다. 대학시절 심플 라이프를 말씀하시며 청년들에게 '학도집' 패턴을 강조하셨던 목사님이 계시다. '학도집'은 말 그대로 학교, 도서관, 집의 동선을 유지하며 심플한 삶의 패턴을 유지하라는 의미였다. 수 많은 약속과 모임, 과중한 업무와 학업 속에서 현대인들은 편히 쉴 수 있는 마음의 거처가 없다. 이러한 각박한 현실을 살아내는 현대인들에게 이번에는 목사님이 아닌 스님이 전하는 심플 라이프의 담론이 차분하게 기록된 책 한권을 만난다.
저자인 '마스노 순묘' 스님은 한 사찰의 주지이자 대학교수, 정원 디자이너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그런 그가 청소법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리뷰를 읽고, 출판사 프리뷰를 읽는 순간 "아! 이 책 사야겠다!" 라는 생각이 든 책이다. 혹자는 청소를 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고, 그것을 청소법이라는 이름으로 책까지 출판했는가라고 의아해 할 수 있지만 나는 이 작은 책 한권을 읽으며 움켜쥐고 버릴 줄 모르는 현대들에게 비움의 미학을 가르쳐 주는 일종의 철학서를 읽은 것과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저자는 책을 통해 우선 청소의 정의를 내린다. "청소란 더러움을 털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당신의 마음을 닦는 것이다." 사찰 수행승들의 수행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청소 방법과 그 청소가 가지는 깊은 의미를 매우 간략하게 현대인의 언어로 풀어내는 고승의 가르침은 참으로 담백하다. 저자는 필요없는 물건에 둘러싸인 방에서 살아가면 마음 속에도 필요없는 감정이나 피로가 쌓인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방을 청소하고 집안을 정리 정돈하는 것은 단순히 더러운 것을 치우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지럽혀진 나의 삶을 재정렬한다는 인생의 깊은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현대인들은 정보가 너무 많아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거나 오히려 불안과 욕심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TV와 인터넷, SNS를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수 많은 정보의 파도는 현대인들의 삶을 조용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물론 정보가 많아서 좋은 점도 있지만 선택해야 할 것과 소유해야할 것을 알려주는과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쩌면 현대인들의 삶은 더욱더 피곤하고 피폐해져만 가는 것은 아닐까?
작년에 TV를 통해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시청한 적이 있다. <손세이셔널>이라는 다큐였는데 다름아닌 지금 영국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에서 대활약하고 있는 월드클래스 축구선수 손흥민에 대한 다큐 프로그램이었다. 세계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들이 뛰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동양인으로서 단연코 두각을 드러내며 연일 전설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있는 손흥민 선수의 피치 밖에서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들이 카메라에 담겨 무척 재미있게 시청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다큐를 보면서 내게 가장 큰 인사이트로 다가온 한 모습이 있었는데 그것은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거액의 연봉을 수령하는 스타 선수의 집 내부였다. 휘황찬란하고 화려할 것 만 같았던 그의 집안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는데 눈에 띄는 것은 집에 물건이 거의 없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정말 딱 필요한 물건들 외에는 거의 물건이 없는 말 그대로 '미니멀 라이프' 그 자체였다. 이렇게 집안에 잡동사니를 싹 다 치운 장본인은 바로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씨다. 손흥민 선수가 오로지 축구에만 전념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잡동사니들이 없는 깔끔한 환경이 필요하다는 손웅정씨의 지론에 의해서 그의 집은 말 그대로 군더더기 없는 심플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나는 이 모습을 보며 200% 동감했다. 학생도 책상과 공부방이 너저분하면 잡념이 떠오르고, 결코 학업에 집중할 수 없다. 딱 책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비움의 미학과 철학을 마스노 순묘 스님은 오랜 수행의 결과로 간파한 것이고,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정돈된 환경을 통해서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억측에 가까운 주장이 나는 결코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라고 믿는다.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기쁘게 버리거나 필요한 이들에게 주거나하는 생활습관이 몸에 배면 자연스럽게 생활 전체가 가벼워진다. 어쩌면 현대인들의 고질적인 문제는 버리지 못하고 계속 움켜쥐고 있는 욕심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나 또한 이러한 불편한 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다.
하루에도 몇번씩 아이들에게 방 정리해라 책상 정리하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정작 나는 버리지도 못하고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저자는 행복에 이르는 길이 새로운 것을 얻는게 아니라 불필요한 뭔가를 내려놓는 것이라는 매우 단순한 진리를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손쉬운 방법이 바로 내 주변을 깨끗히 청소하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청소란 이렇게 단순히 먼지를 털어내는 1차원적 행위로서 그치는 것이 아닌 청소하는 사람의 마음을 닦아내고 삶의 질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그 이상의 깊은 의미를 포함하는 성스러운 그 무엇이다. 버리고 비울 때 비로서 보인다. 얼키고 설킨 인간관계의 스트레스, 과중한 업무의 압박도 내 주변의 잡동사니를 치우고 청소하는 일련의 행위를 통해 자연스럽게 제 자리를 찾아가는 날들이 있을 것이다. 그 버림과 비움의 미학이 가득한 순백의 책 한권을 일상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기꺼이 권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