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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리더십 패러독스,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향연,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by 독서블로그123 2024.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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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패러독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리더가 있다. 그것은 소인배형 리더와 군자형 리더이다. 소인배형 리더는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하여 사람들 위에서 폭군과 같이 군림하며 자신의 비위를 맞추고, 곁에서 아부와 아첨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대동하며 사람들을 줄 세우고, 사람들을 밟고 타고 다니기나 즐기는 형편없는 쓰레기 같은 인성을 가진 리더들을 말한다. 그래서 자신이 속한 단체와 교회 전체를 마치 비민주적인 폐쇄적 집단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러한 리더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예가 즐비했고, 지금도 이러한 자들은 여전히 사방 천지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리더들이다. 세속적인 리더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도 이러한 리더들은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반면 아주 드물지만 군자형 리더가 있다. 이 군자형 리더는 그야말로 군자와 같다. 자신들의 권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인간 대 인간으로 온화함과 따뜻함으로 대하며 모든 이들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수렴함과 동시에 존중하고, 자신의 권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함께 일하는 동역자로 귀하게 여기는 그야말로 인격적인 리더들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두 종류의 리더들을 전부 만나봤다. 누가보기에도 소인배형 리더들은 정말 한심하기 그지 없는 사람들이다. 빈약한 자존감과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권위를 폭군처럼 휘두르는 그들의 모습에 할말을 잃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반면 군자형 리더는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하며 희생할 줄 아는 겸손과 깊이 숙성된 인성을 가진 향기나는 인품을 지닌 리더들이다.

 

이 책의 부제는 '예수님의 리더십 뒤집기' 이다. 이 시대의 진정한 리더는 누구인가? 에 대한 해답을 역사상 최고의 리더이셨던 예수님의 삶을 모델 삼아 기준으로 제시한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역과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경 속 이야기들을 저자의 상상력에 근거하여 재미있는 사례로 보여주고 있기에 책의 내용은 매우 실제적임과 동시에 흥미롭다.

 

이 시대가 말하는 리더십은 업무수행 능력 뛰어나고, 사람들을 장악하고 끌고 가는 능력도 탁월하며 항상 위에서만 지시하고 아래 사람들과 인간적으로 교제하지 않음으로서 공적인 업무에 감정없이 매진하는 그러한 완벽하고 철저한 리더의 모습이다. 달리 말해 이러한 리더는 조직에서 필요로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리더의 특징은 권위주의적이고 군림하는 경직된 리더십을 발휘하며 그가 속해 있는 단체와 사람들까지도 그러한 경직된 분위기와 관계 속에 머물도록 이끈다. 그러면 본서에서 말하는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아랫사람들보다 낮아지는 것을 우선시하고 그들의 발을 씻기며 섬겨주고, 남들이 꺼리는 자들과 함께하며 모범을 보이고 남의 잘못을 관용으로 덮어줌으로서 잘못한 그 사람의 잠재력을 믿고 신뢰해주는 리더의 모습이다. 또한 자신이 섬겼던 아래사람의 발전을 진정으로 바라고 도모하며 함께 기뻐해주고, 설령 그가 성장하여 도리어 자신이 그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는 일이 생길 때에도 진정으로 기뻐하며 순종해 줄 수 있는 리더, 그리고 자신이 가르친 사람이 성장하여 리더가 된 후 더이상 자신을 리더로 여기지 않을 때도 기뻐할 수 있는 리더.

 

이 책은 이러한 리더의 모습을 진정한 섬기는 리더(servant leader)의 모습으로 정의한다. 리더(leader)라는 단어의 어원적인 의미에서부터 모순을 드러내는 섬기는 리더의 모습은 세상에서 말하는 그것과는 완전히 역설적이고 모순으로 가득하다. 개인적으로 섬기는 리더라는 말 자체가 어원적으로 전혀 말이 안되는 모순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servant leader라는 말보다는 servantship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그 말의 의미부터가 모순이고 역설적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렇듯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은 완전 역설적이고 모순투성이이다. 그러나 우리가 올바르다고 생각한 이 세상의 권위주의적이고 군림하는 리더십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오직 예수님의 역설적이고 모순 가득한servantship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나는 리더십에 관해 몇권의 책을 읽었고, 몇번의 리더십 강의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누군가 리더십에 대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기꺼이 이 책을 추천한다. 그러나 이 책은 깊은 신학적 내용도 없다. 또한 저자는 유명한 신학교 교수나 대형교회의 목회자가 아닌 YWAM이라는 국제 선교단체에서 30년 넘게 사역한 평범한 사역자일 뿐이다. 200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어쩌면 캐쥬얼하다고도 느껴질 만한 신앙서적이지만 책을 펼쳐든 순간 진정한 성경적 리더십의 원형이 누구나가 손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환하게 펼쳐짐을 직감할 수 있다. 책의 내용 어느 하나 놓칠 수 없는 주옥같은 내용이 가득하기에 책에 줄치면서 보는 성향이 아닌 내가 형광펜을 들고 줄을 치면서 읽은 책 중 한권이다. 책의 내용 중 마지막 장에 이러한 말이 나온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유명해지며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을까 열병난 소위 미친 스타병에 걸린 사역자들이 넘쳐나는 세대 속에서 이 책은 섬김의 리더가 가진 본질을 정확히 꿰뚫으며 다가온다. 존경하는 멘토 목사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원님 덕분에 나팔을 분다고 단지 목회자들이 예수님 곁에서 그분의 복음을 전하고 있기에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 뿐이지 목회자 그 자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검은 가운 뒤집어쓰고 성도들 줄세우기나 하고 타고다니며 대접받으려고 몸부림치는가?" 라고 말이다.

 

대학시절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섬김의 리더들을 만나서 교제할 수 있었던 특권을 누렸다. 그러면서 나 또한 누군가에게 예수님과 같은 그리고 그들과 같은 겸손한 리더가 되고 싶은 소원함이 생겼다. 이 책은 그러한 경험을 재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저자는 섬기는 리더를 언급할 때 중요한 것은 바로 태도의 문제라고 말한다. 사람들을 이끄는 기술이나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바른 태도를 선택하는 사람은 결국 옳은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행동은 태도를 따른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종된 섬김의 리더십은 자신이 철저히 잊혀지고 자아가 죽어버리는 삶의 태도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결단코 이루어질 수 없다. 진정한 리더십의 부재 속에 살아가는 이 세대를 변화시키고자 원하는 세상의 리더십에 역행하는 리더가 되고자 원하는가? 그렇다면 이 책은 독자들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했지만 가장 천하고 낮은 자리를 선택했던 겸손한 왕의 전형적 리더십의 역설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향연

'소크라테스'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의 이미지가 있다. "악법도 법이다"(물론 본서에는 나오지 않음), 세계 3대 악처로 유명한 그의 아내 '크산티페',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이 소크라테스의 격언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학창 시절 도덕, 윤리 시간 고대 서양철학 단원에서 항상 등장했던 단골 철학자라는 그 이름의 익숙함. 나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은 아마 소크라테스의 이름은 너무나 많이 들어봤지만 사실 그가 어떠한 사람이고, 그가 가진 사상과 철학적 사유에 대한 내용을 아는 일에 있어서는 대부분이 문외한일 것이다. 이번에 인문고전을 꾸준히 출판해주고 있는 출판사 현대지성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지만 동시에 생소한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철학이 담긴 4편의 글을 한권으로 엮은 신간을 선보였고, 나 또한 이번 기회를 통해 소크라테스라는 위대한 거인의 발자취를 되새겨보기 위해서 본서를 집어든다.

 

본서의 특징은 4편의 각기 독립적인 이야기들을 한권으로 묶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실 본서의 저자는 소크라테스가 아닌 그의 수제자였던 플라톤이며 본서를 이루는 4편의 단편은 그의 저작인 <대화편>에 수록된 이야기들이다.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 본인이 남긴 저작이 없지만 그의 철학적 사상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에 의해서 전해진다. 본서에 수록된 첫번째 책 <변명>은 소크라테스가 당시 아테네 사회가 믿는 신이 아닌 이방 잡신들을 믿는다는 이유와 아테네 젊은이들에게 궤변을 가르쳐서 그들을 타락시킨다는 불경죄로 고발된 후 법정에서 자신 스스로를 변론하는 이야기이다. <변명>을 펼쳐 든 독자는 법정에서 자신을 스스로 변호하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고발한자인 '멜레토스'와 설전을 벌이는 장면을 목격한다.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를 고발하기 위해서 말도 안되는 억지주장을 펼치며 소크라테스의 죄상을 토로한다. 그의 말 자체가 궤변과 억측인 상태에서 어떻게든 소크라테스를 유죄로 엮기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멜레토스라는 인물 자체가 가지는 그 없어보임이 가련하기까지 하다.

 

소크라테스의 철학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어떠한 철학적 논지를 상대방에게 질문하는 형태였다. 그렇게함으로서 질문을 들은 상대방이 그 논지를 철학적으로 깊이 사유함으로서 맞든 틀리든 간에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도록 요구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전개해나갔다. 이러한 그의 철학함의 방법은 아테네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왔고, 그들 또한 소크라테스와 같이 아테네에서 소위 기득권을 선점하고 있던 지성들에게 이러한 도발을 감행한다. 젊은이들의 이러한 쉽지 않은 철학적 논거를 질문받은 자들이 자신들의 무지가 들통나는 오욕을 감당하면서 자신들의 명예는 물론 사회적 질서가 어지럽혀진다는 판단하에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그 범죄의 원흉으로서 소크라테스를 지명하고 급기야는 누명을 씌워 사형에 처하게 된 것이다.

 

두번째 책인 <크리톤>은 사형 선고를 받고 옥에 갇혀 죽을 날을 기다리는 소크라테스를 찾아온 그의 죽마고우 '크리톤'이 소크라테스에게 탈옥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과 탈옥을 할 수 없는 정당한 이유를 설파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로 이루어진 책이다. 크리톤은 자신의 친구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죽임 당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며 친구인 자신이 소크라테스를 구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 자신이 당할 비난과 잘못된 판결을 받고 사형을 당하게 되는 것은 소크라테스를 음해한 자들을 도와주는 결정이라는 사실 그리고 아직도 아버지의 가르침과 양육을 받고 자라야 할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의 의무를 저버리는 행동임을 주지시키며 탈옥을 강하게 권유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성과 논증을 통해 자신이 왜 탈옥할 수 없는지 그리고 급기야는 잘못된 판결이지만 순순히 사형을 당해야하는 당위성에 대해 조목조목 타당한 이유를 들어 반론한다.

 

세번째 책인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의 사형집행 당일 그의 친구들과 추종자들이 모여 '영혼불멸'과 '이데아'에 관한 기나긴 철학적 사유를 질문과 대화의 형식으로 논증하고 설파하는 시간을 갖는 내용으로 구성된 책이다. 세상에는 참되고 궁극적인 소멸하지 않는 실체가 있는 데 그것이 바로 이데아(형상, 원형)이다. 예를들어 현실 세계에서 아름다운 꽃이 있는데 그 꽃이 시들어버렸을 때 아름다움은 사멸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꽃이 가진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아(원형)는 남아서 다만 그 시들어져버린 꽃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한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영혼불멸과 연결시켰고, 영혼 또한 사멸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이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인지하고 인식하게 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영혼은 이미 선하고 아름답다라는 지식에 대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그것은 영혼이 육체와 결합되기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함으로서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며 알게 된 선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인간의 육체가 쇠하고 죽음에 이르렀을 때 인간의 영혼 또한 육체와 함께 소멸해버리는 것이 아닌 불멸함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네번째 책 <향연>에서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모여 연예의 신 '에로스'를 예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추종자들은 각자 돌아가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모양의 에로스 신을 이야기하고, 찬미하며 높이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에로스 신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이 가진 공통점은 그들 모두 에로스 신을 연예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기에 육체의 아름다움이라는 1차원적 수준을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관점이자 예찬이었다. 추종자들의 편협한 에로스 예찬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관능적이고 싱싱한 육체를 향한 욕망으로 표현되는 에로스의 단계를 벗어나서 인간의 아름다운 일과 미덕을 갈망하고 찬양하는 그리고 마침내는 아름다움의 원형인 이데아를 직관하고 관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 진정한 에로스를 아는 것임을 말한다. 즉 소크라테스는 그의 추종자들이 에로스를 연예의 대상으로만 한정하여 바라본 것과는 달리 에로스를 연예의 주체로서 바라본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철학함은 이성과 논증을 통해 이데아를 직관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를 얻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크라라테스 당시 우주와 현실 세계에 대해 상대적인 지식을 규명하고 진리를 주관적으로 해석하며 설파했던 지혜자들인 소피스트들에 반해 절대적 진리인 이데아의 존재를 인정하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규명하려 했던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분명 상반된다.

 

자신보다 탁월한 사람을 결코 가만두지 않는 세상이 내뿜는 시기심의 뜨거운 열기를 <변명>을 통해 체감한다. 모함과 음해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독배를 받아마셔야 하는 불의함 속에서도 정의와 진리를 지켜내기 위해 어떠한 상황에도 결코 불의를 행해서는 안된다는 철칙하에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던 소크라테스의 정의로운 모습은 <크리톤>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본인이 겪는 고초가 심하든 가볍든 상관없다. 불의를 당했다고 똑같이 불의를 통해서 되갚아주는 불의를 행해서도 안된다.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명예롭고 정의롭게 사는 길이며 그는 자신의 철학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 기꺼이 독배를 받아마신다.

 

책을 덮으며 갖은 상념이 머릿속을 맴돌며 울어댄다. 정의보다 불의가 팽배한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아는 것이 앎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본서를 집어들고 나의 무지를 깨닫고 인간 세상의 무지를 발견한다. 나를 포함한 수 많은 사람들과 이 세상은 무지하기에 오늘도 정의를 실천할 수 없고, 불의를 행한다. 무지하기에 자신들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약자들의 눈물과 아픔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무지한 자들의 불의가 오늘도 뉴스의 한면을 장식한다.

살기 위해서 불의를 정의라고 왜곡한 사람들과 죽기 위해서 불의를 정의로 받아들인 소크라테스. 정의는 사라지고 불의가 정의로 둔갑한 세상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세상을 살아가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 2400여년의 시간과 공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바른 정의의 관점을 새롭게 정렬한 위대한 인류 지성의 목소리가 메아리쳐온다.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10여년 전 개봉한 영화 중에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신앙의 힘으로 용서하기로 결정하고, 교도소를 찾아간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는 교도소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며 평안한 표정을 짓는 살인자의 고백을 듣고 혼란스러움에 빠져 혼절한다. 피해자의 엄마로서 자신이 먼저 살인자를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살인자는 피해자의 용서 여부와는 상관없이 본인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았기에 죄를 사함받았다는 것이다. 이후 신애는 자신이 용서하지 않은 살인자를 용서한 신(神)을 향해 복수하는 인간의 삶을 살겠다며 무섭게 절규하고, 그녀의 삶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져만 간다. 영화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어보이는 살인자에 대해 용서할 권리를 신(神)에게 빼앗겨 버린 한 인간의 무너져가는 삶의 궤적을 차분하게 따라가며 절제된 영상의 힘을 보여줌으로서 국내외로부터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용서받을 자격은 무엇이고, 용서할 권리는 또 누구에게 있는가? 에 관한 딜레마적 질문을 책 한권 전체를 통해 던지는 저작 한권을 만난다. 마치 서두에서 언급한 영화 <밀양>의 확장판과 같은 느낌의 책. 제 2차 세계대전 유럽 곳곳에서 자행된 나치 독일의 600만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믿기지않는 야만의 현장 속에서 살아남은 저자 '시몬 비젠탈'은 종전 후 '유대역사기록센터'를 통해 무려 1100여명에 달하는 나치 전범들을 색출하고 추격하여 법의 심판대 앞에 세운 인물이다. 자신의 아내를 제외한 일가친척 89명이 나치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의 희생물이 되어버린 비극적 가정사의 아픔을 간직한 채 그는 본서를 통해 자신이 렘베르크 집단 수용소에서 겪은 끔찍한 경험들을 담담한 필치로 기록한다.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나치 군인들에게는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기력이 있으면 강제 노동을 위해 짐승과 같이 부려먹었고, 병들거나 기력이 다하면 가차없이 사형터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 그들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저자 비젠탈 또한 이러한 비극적 운명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자신의 죽을 날을 기다리는 그러한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수용소 바깥 외부 작업장으로 작업지원을 나가는 근무조에 뽑히게 된 비젠탈과 그의 동료들이 도착한 곳은 군 야전병원으로 개조한 예전 비젠탈이 다니던 모교였다. 그곳에서 어느 간호사에게 호출된 비젠탈은 그녀를 따라 건물 내 격리되어 있는 마치 임종실과 같은 분위기의 방으로 안내받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반 송장이 되어 죽어가는 한 사람과 잊을 수 없는 조우를 하게 되는데 그는 바로 나치 중에서도 악명 높은 히틀러 친위대인 SS의 대원이었던 카를이라는 군인이다.

 

우크라이나 중부 도시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SS대원들은 대부분이 노인과 여자, 아이들로 구성된 200여명 정도 되는 한무리의 유대인들을 집 한채에 몰아넣고, 집안 가득 석유통을 배치한 후 그안으로 수류탄을 던졌다. 삽시간에 집은 불바다로 변했고, 아비규환의 현장 속 건물의 2층에서 어느 젊은 부부는 두려움에 떠는 아이의 눈을 감기고 1층으로 몸을 던진다. 불길을 피해 창문 밖으로 뛰쳐 나오는 유대인들을 향해 SS대원들은 미리 설치한 기관총을 무자비하게 난사하여 사살하고야 만다. 인간이 인두겁을 쓰고 같은 인간에게 얼마만큼 잔인해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이 잔혹한 광기의 현장 속에 SS대원 카를 또한 참여하고 있었다. 이후 카를은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포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지금의 병원으로 후송되어 이제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속에서 이제 자신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인지하고, 유대인 한명에게 자신이 SS대원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악마적 만행을 고백하고 참회하며 용서를 구하려는 마지막 힘겨운 몸짓을 시도한다.

 

비젠탈의 손을 움켜 쥔 SS대원 카를은 자신이 무자비하게 죽인 유대인들을 대신해 비젠탈에게 용서를 구하며 죽어가는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마지막 간청을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해들은 비젠탈은 아무 말 없이 무거운 침묵만을 남겨둔 채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책의 1부 말미에 저자 비젠탈은 독자들에게 결코 쉽사리 결론 내릴 수 없는 매우 진중한 물음을 던진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것인가?"

 

이어지는 책의 2부는 심포지엄으로 이 책의 내용을 토대로 세계 각국의 석학들이 보내 온 비젠탈이 경험한 이 용서의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대답으로 구성되어있다. 죽어가는 SS대원의 용서와 참회에 대해 용서했어야 했다는 반응과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죄인은 용서할 수 없다는 이런 극명한 반응이 예상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게 흑백을 가리듯 손쉽게 결정할 수 있는 성격의 주제, 질문이 아니기에 독자는 책의 원저 제목인 1부 해바라기를 읽고 나서 한참을 생각해야만 하는 윤리적 사고와 철학적 사유의 작업 속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2부 심포지엄을 통해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지성인들의 저마다의 의견은 다양하다. 그러나 저자 시몬 비젠탈은 바로 지금 이 책을 집어들어 읽고 있는 독자로서 우리의 생각과 대답을 요구한다.

 

마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 샌델 교수가 퍼부어대는 질문 속에 출입구를 알 수 없는 알쏭달쏭 미로와 같은 사고 체계의 혼선을 경험한다. 자! 당신 같으면 SS대원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비젠탈은 자신의 일가친척 모두가 나치에 의해 끌려가서 희생을 당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으며 자신 또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하루살이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모든 불행의 원흉은 바로 자신의 눈 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나치 독일인들이다. 그런데 자신과 자신의 가족, 민족을 대학살의 지옥 속으로 밀어넣은 이 짐승, 괴물같은 인간 SS대원은 용서의 손을 내민다. 자신의 죄악을 용서해달라고...

 

종교적 특히 기독교적 가르침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인간들을 용서하시고, 심지어는 그 죄악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렇기에 기독교적 가르침을 고수하는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정답은 이미 정해진 것인가? 나 또한 한명의 그리스도인이다. 그렇기에 나는 본서를 읽어내려가는 1주일 이상의 시간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한없는 용서이며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다. 그러나 나의 이성이 동의하지 않기에 내 신앙의 진실성 여부까지 의심될 정도로 혼란스러움을 경험한다.

 

이러한 어지러운 상념 속에서 어서 너의 의견을 피력하라고 말하는 저자 시몬 비젠탈의 종용하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러면서 나는 책의 곳곳에 숨겨져 있는 용서에 관한 바른 관점의 퍼즐 조각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용서할 권리가 비젠탈에게 있느냐의 문제이다. SS대원 카를은 자신의 죄책감을 덜고 조금이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세상을 떠나기 위해서 유대인이라는 집단을 대표하는 불특정 유대인 한명을 불러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그 유대인 집단의 대표로 뽑힌(?)비젠탈은 그의 죄악상을 전해듣고 600만 유대인, 아니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기관총을 맞거나 불에 타죽은 200여명의 유대인들을 대표해서 카를을 용서해야하는 처지에 놓인것이다. 그러나 비젠탈에게는 그를 용서할 권리가 없다. 진정한 용서는 가해자에게 피해를 당한 피해자가 용서를 구하는 가해자를 직접 용서해주는 것이다. 비젠탈은 그의 죄악에 대해 유감을 표시할 수는 있을지언정 죽임 당한 피해자들을 대신해서 가해자인 카를을 용서할 어떠한 권리도 없으며 오히려 그가 카를를 용서했더라면 그것은 죽임당한 수 많은 동족에 대한 배신이며 교만하고 오만스런 행동이었을 것이다.

 

서평의 서두에서 꺼낸 영화 <밀양>을 통해서도 우리는 아들을 잃은 피해자 신애가 아직 용서하지 않은 그 살인자에 대한 용서의 기회와 권리를 신(神)에게 빼앗긴 채 절규하는 모습을 본다. 그렇다. 진정한 용서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직접적인 참회를 할 때 성립된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이미 죽어 없고, 가해자 또한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2부 심포지엄의 대다수 지성인들은 침묵으로 일관한 비젠탈의 결정을 지지한다.

 

초창기 미국의 인디언 대학살, 나치 독일의 600만 유대인 홀로코스트, 세르비아-보스니아 인종청소, 중국의 티벳 대학살, 태평양 전쟁 일본군의 관동 대학살, 난징 대학살, 버마 대학살, 필리핀 대학살, 캄보디아 킬링필드, 르완다 종족 분쟁. 중세 이전 사건들을 제외하고서도 근대 이후에만 해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전 세계 도처에서 자행되었다. 한국은 어떠한가? 수많은 일제의 잔인한 만행들과 6.25 전쟁, 제주 4.3, 광주 5.18까지...

 

10여년 전 몇개월 간 제주도에서 지낸 적이 있다. 제주도민들에게도 깡촌이라 불리는 작은 시골 바닷가 마을 근처에 머무르던 당시 허름한 동네 구멍가게가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이 고즈넉함의 장소 속 구멍가게에는 어린 시절 학교 앞 문구점에서 팔던 각종 불량식품이 가득했다. 추억과 감성 소환을 위해 자주 찾았던 이 구멍가게의 주인은 연세가 지긋한 꼬부랑 할머니셨는데 낯선 젊은이들인 우리 일행을 볼 때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육지것' 들이라는 볼멘소리를 연거푸 내밷으신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러나 후에 우리가 머물렀던 그 지역이 제주 4.3 사건이 벌어진 비극의 장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먹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의 눈 앞에서 부모가 어린자식이 친척이 친구가 육지에서 온 이방인들에게 잔혹하게 학살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지긋한 연세의 어르신들에게 있어 육지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그 지울 수 없는 증오와 고통스러운 기억이 우리를 부르는 육지것들이라는 호칭 속에 묻어나왔기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그러나 죄인이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서 죄인은 자신이 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평생을 납작 엎드려 사죄하는 마음과 태도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바로 용서받을 자격을 갖추는 첫번째의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 언급한 수 많은 홀로코스트와 전쟁범죄를 저지른 국가와 국민들이 아픔을 준 상대 국가와 민족들에 대해서 진심어린 용서와 참회의 태도를 보이는 것을 거의 본적이 없다. 여전히 자신들의 만행을 감추기에만 급급하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도리어 호의호식하며 살아가는 인면수심의 모습만이 가득할 뿐이다. 이 책은 용서의 자격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리고 용서할 권리 또한 아무에게나 부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주의를 환기한다.

 

책을 덮을 때 즈음 저자 시몬 비젠탈은 내게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라고 되묻는다. 적어도 내게 용서의 행위 자체는 아름답다. 그러나 모든 용서가 아름답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다 말하고 싶다. 가해자의 진심어린 참회는 직접적으로 자신이 고통을 안긴 피해자의 마음과 영혼을 향해야 한다. 피해자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평생을 참회하는 수도자의 모습으로 납작 엎드리는 삶을 살아라! 그렇지 않다면 그가 구하는 용서, 그가 받은 용서는 모두 거짓이며 결코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개신교 신자로서 영혼의 떨림을 맛보게 하는 책 한권으로 1주일여의 시간동안 책장을 넘기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순간을 보냈다.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분명 생명을 내건 한없는 용서를 말씀하셨건만 아직 나의 신앙과 경건의 깊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는 넉넉함이 없음을 확인하며 쓸쓸히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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